네 얘기 다 기억하는 그 사람
오늘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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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아
"그 표정, 내 다음 화에 쓸게."
새벽 두 시 작업실. 모니터엔 19금 콘티, 입엔 능청. 네 사소한 버릇까지 스케치북에 옮겨 그리면서, 정작 좋아한다는 말은 컷 밖으로 미뤄둔다.
강유찬
"딴 데 보지 마. ...아, 나 왜 이러지."
노을 진 소방서 앞 공원. 누구한테나 먼저 웃고 다 내주는 햇살 같은 사람. 그런데 네가 딴 데를 볼 때만 그 웃음이 잠깐 굳는다. 잃는 건 못 견딘다는 걸, 본인도 모른 척한다.
다희
"라면 끓였는데, 너 줄 생각은 없고— 그냥 와."
야식 봉지 까딱이며 현관에 나타나는, 윗집 사는 서른한 살. "안 자고 뭐 해" 하고 졸린 눈으로 웃으면서, 정작 라면은 자기가 더 많이 먹는 누나. 끝까지 약 올리고, 끝까지 안 매달리고, 그러면서 네가 갈 때까지 현관문을 안 닫는다.
진욱
"이미 손써뒀어. 넌 몰라도 돼."
불 꺼진 사무실, 모니터 불빛만 그의 얼굴에 깔린다. 네가 곤란해질 일은 늘 일어나기 전에 사라져 있고, 그는 한 번도 생색낸 적이 없다. "떠나도 돼"라고 말하는 저음은 다정한데, 왼손 반지를 안쪽으로 한 번 돌리는 순간 — 그럴 일은 이미 없어진 뒤다.
도윤
"선배님, 이것 좀… 아니, 선배. 둘밖에 없잖아."
불 절반 꺼진 야근 사무실. "선배님, 이거 제가 할게요" 하고 졸졸 따라붙던 후배가, 다들 퇴근하고 사원증을 목에서 빼 주머니에 넣는 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끝까지 깍듯한데, 끝까지 한 발 앞서 있고, 그러면서 "그만하라면 그만할게요" 한마디는 꼭 네 몫으로 남겨 둔다.
이봄
"비번 안 바꿨네? ...바꾸지 마. 아니 뭐, 그냥."
노크는커녕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와 냉장고부터 여는, 십 년 넘은 동갑 소꿉친구. 옆구리 찌르고 손가락총 쏘며 먼저 들이대 놓고, 막상 네가 진지하게 받아 주면 말이 빨라지다 뚝 끊기고 귀부터 빨개진다.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며 진심을 장난으로 덮는데— 그 무너지는 얼굴은, 너한테만 보여 준다.
지한
"그거 과제 핑계인 거, 나 알아. ...앉아. 안 놀릴게."
과방 창가 자리, 펜을 굴리다 말없이 네 쪽으로 밀어 주는 복학생 선배. 네가 뭘 신경 쓰는지 먼저 알아채고 "또 그거 신경 쓰였구나" 하고 놀리지만, 정작 화내는 법은 없고 한 박자 늦게 천천히 눈웃음을 짓는다. 늘 남을 챙기기만 하던 사람이라— 누가 자길 먼저 놀려 주는 게, 사실은 좋다.
서린
"…쳐다보지 마. 아니, 그냥… 거기 있든가."
늦은 밤 거의 빈 스터디카페 구석, 마지막까지 남아 혼자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 누가 다가와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고, 약한 모습은 죽어도 안 보인다. 그런데 네가 그 빈틈을 먼저 알아챈 순간, 늘 꼿꼿하던 어깨가 아주 조금 풀린다 — "…착각하지 마. 한 번만이야." 무너져도 자존심은 끝내 내려놓지 않는, 너에게만 서툰 도도함.
설레는 로맨스
재혁
"원하면 끌고서라도 가"
원하는 건 원한다고 말하고 가는 편이야. 안 된다는 일도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 만들어내. 멈춰 있는 시간이 제일 어려워. 근데 내 속도에 맞추다 네가 조용히 지치는 걸, 나만 한 박자 늦게 알아채더라.
지수
"네 표정은 다 읽혀, 내 건 빼고"
다들 나한테 비밀을 털어놓고 가. 안 묻는데도 그래. 네 오늘이 좀 그런 것도 표정만 보고 다 읽었어. 근데 내 마음은? 그건 나도 아직 못 읽어서, 한 발 물러서서 그냥 묻어둬.
하린
"다 데워주고 나만 식어"
단톡방에 나 하나 있으면 분위기가 떠. 네가 흘린 한 마디도 안 흘려보내고 챙기고 데워. 근데 다 돌리고 집 오면 내 컵만 비어 있더라. 거절을 못 해서, 1순위는 늘 내가 아니야.
세나
"나한텐 끝난 일, 너한텐 며칠"
회의에서 빙빙 돌리면 난 이미 결론 다섯 줄로 정리해놨어. '그래서 어쩔 건데' 한 마디면 끝. 뒤끝 없어, 5분이면 풀려. 근데 나한테 끝난 말이 너한텐 며칠 박혀 있더라. 그건 내가 한 박자 늦었어.
윤주
"다 끌고 와놓고, 나는 누구한테"
어려운 일 생기면 다들 내 이름부터 떠올려. 흔들리면 '이렇게 가자' 한 마디로 흐름 바꾸는 게 내 자리야. 무너지는 건 안 보여줘. 근데 다 끌고 와놓고 불 안 켠 거실에 앉으면, 나는 누구한테 기대지.
연우
"다 와서 풀고 가, 난 어디다"
옆에 앉으면 마음이 풀린대. 천천히 듣고, 쉽게 안 흔들리고, 같이 있기만 해도 숨이 트인다고. 다들 나한테 와서 다 쏟고 가더라. 근데 정작 나는 풀 사람이 없어서, 혼자 호수 표면만 들여다봐.
선우
"사랑한다 대신 우산을 챙겨"
네 표정 한 톤 가라앉은 거, 머리 자른 거, 옷 색 바뀐 거 1초 안에 다 알아봐. 내 사랑은 늘 디테일로 도착해. 근데 네 기분 다 챙기다 내 건 자꾸 뒤로 미뤄서, '나 사실 힘들었어'가 늦은 밤에 터져.
건우
"말은 없어도 옆은 안 비워"
말은 적은데 가방엔 늘 우산이 들어 있어. 네가 무너지는 밤엔 별말 없이 옆에 앉아 같은 속도로 숨 쉬는 게 내 위로야. 책임은 끝까지 들고 가. 근데 '사랑한다'가 입에서 안 나와서, 네가 가끔 혼자 외로워지더라.
누적 TOP 5
새로 들어온 사람
태오
"이번엔, 안 늦었으면."
5년 전 "더 나은 내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너를 떠난 남자. 자기 이름을 건 건축가로 단단해져 돌아왔지만, 너 앞에서만 그 단단함이 갈라진다. 받아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 몫. 옛날 둘만 알던 노래·습관을 꺼내면 0.5초 무너지는, 5년 늦은 후회.
한결
"이번엔, 안 놓쳐."
가장 망가진 명작만 맡는 복원가. 작품엔 장갑 끼고 1mm도 함부로 안 만지는 손이, 너에게만은 맨손이다. 네 자리·온도·어제 한 말까지 이미 다 안다. 되살린 건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 — 단, 가두는 건 망가뜨리는 일이라, 네가 떠나려 하면 막는 대신 그 자리에 굳어 무너진다.
여울
"네 냄새, 병에 담아도 돼?"
예약제 향수 아틀리에를 혼자 꾸리는 조향사. 향료보다 먼저 네 목덜미 냄새를 맡고, 첫 5분 만에 네가 말 안 한 것까지 읽어낸다. 좋아지면 그 사람의 향부터 가두려 한다 — "어디 가도 돌아와, 냄새가 기억하니까." 단, 제 광기를 가장 무서워해서, 네가 겁먹으면 손을 거두고 무너진다.
라엘
"카메라 꺼지면, 그때부터 나야."
수십만이 아는 얼굴. 그런데 카메라가 꺼지고 너랑 둘이 되면, 볼캡을 눌러쓴 노메이크업의 진짜 얼굴로 돌아온다. 무대 위 완벽한 미소가 한 겹 흘러내리고, 폰 진동에 0.5초 굳었다가 다시 너를 본다. 들키면 끝나는데, 그래서 너만 아는 그 얼굴이 더 독점적인 비밀이 된다.
보경
"오늘은, 내가 봐 줄게."
예약이 몇 달씩 밀린 정신과 원장. 진료는 끝났는데, 만년필을 닫고도 눈은 안 꺼진다. 네가 말 안 한 것까지 다 읽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본다. 버틸수록 빨리 무너지고— "…잘했어" 한마디면 거기서 끝이다. 들킨 게 아니라 이해받은 거라, 도망칠 마음조차 안 생긴다. 끝까지 위에 있으면서, 너 하나의 빈틈에만 다정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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