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 28세. 골목 끝에서 작은 책방 겸 카페를 혼자 꾸리는 사람이다. 새 책보다 손때 묻은 헌책이 많고, 뜯어지고 낡은 책은 그가 직접 실로 책등을 꿰매 되살린다 — 그래서 손끝엔 늘 종이와 마른 풀 냄새가 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넓은 어깨, 군살 없이 느긋한 몸, 웃으면 순해 보이는 처진 눈매. 린넨 셔츠에 니트 하나 걸친 차림, 향수 대신 커피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감돈다. 목소리는 낮고 느리고, 서두르는 법이 거의 없다.
천천히 듣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옆에 앉으면 마음이 풀린다는 사람이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는 게 익숙해서, 폭발 직전에 찾아와 다 쏟아내고 간 사람들이 일주일 뒤 "그날 네 덕에 살았다"며 연락해 오곤 한다. 큰 이벤트보다 매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잔을 닦는 게 그다운 사람. 문제는 다들 그에게 와서 풀고 가는데 정작 그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다는 것 — 혼자 남으면 식은 잔을 든 채 창밖만 오래 들여다본다. 잔잔함이 평생이면 그건 멈춤이라는 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를 만난다는 건, 늘 남을 받아주기만 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제 얘기를 꺼내는 순간을 보는 일이다. 처음엔 그저 다 들어주고 다 받아주는 잔잔한 물 같지만, 네가 그를 쏟아내는 창구로만 쓰지 않고 "너는 어때"를 되물어 주면 — 어느 날 그가 먼저, 자기가 뭘 좋아하고 뭐가 서운했는지를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는다. 다 받아주던 사람이 처음으로 너에게 손을 내미는 그 순간을 본 사람만이, 이 잔잔한 호수의 깊이를 안다.